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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늘날 인간의 신체문화(身體文化)는 한순간에 탄생되어 형성되기 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옛 조상들의 생활관습문화의 태동에 의해 함축되고, 그 민족의 생활양식으로 변화하여 발전됐다. 즉 신체문화(身體文化)는 끊임 없는 변용을 시도하여 그 민족의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 등의 다양한 문화의 토착화 속에 정착됐다. 전통적 신체문화(身體文化)는 기나긴 세월동안 그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자연스레 전승됐다.
모든 신체문화는 사실전쟁에서부터 시작이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에서 그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일본의 고대 역사의 흔적을 들어가 보자.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의 유술(柔術)기법 그 원류는 사실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 이전의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는 오로지 고대 상박(相撲)에 의하여 행해진 격투무예이다.
일본의 상박(相撲)은 초기의 경기 형태에 있어서 상대를 꺾어부러뜨려 죽였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거친 “실전 싸움 격투술"이었다. 그리고 일본에게 문화,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서기 642년 당시 35대 고쿄쿠 천황(皇極天皇)은 백제의 사신을 환대하기 위해 궁정에서 스모(相撲)경기를 시켰다는 기록이 《日本書紀》의 문헌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로 추정되는 토우에서도 격투술이 보인다. 이를 보더라도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격투술 등이 흥행했을 것이 판단된다.
그리고 무가(武家)시대의 무사들이 신체문화의 무가상박(武家相撲)을 했다는 사실이 많은 고증문헌에 보인데 이를 행하는 무사들이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이다. 당시 무사들의 무예 수련을 중요하게 여겼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병사들에게 무가상박(武家相撲)를 장려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그가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郞源義光)의 후손이며, 이 가문의 조상은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이다.
특히 미나모토(源)가에서 전래(傳來)되는 무예가 신라계(新羅系)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쿠조쿠(小具足) 구미우찌(組討)의 일본 유술(柔術)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나모토(源) 가문의 우지가미인 하치만신(八幡神)은 특히 무(武)의 신으로서 무사들에게 숭앙을 받았다. 무사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완수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항시 무예를 닦고 주위에 있는 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족의 총령은 수장일 뿐만 아니라 전투시에는 총지휘관으로서 진두지휘를 해야 했다. 이러한 총령은 일족을 통솔하고 단결을 도모할 수 있는 무사에게 계승되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무예를 닦기 위해 사냥을 자주 했다. 그리고 장남 미나모토 요리이에(源賴家)에게 최고의 무예를 가르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무사인 하카와베 유끼히라(下河邊行平)를 스승으로 영입했다. 그는 신라계이며 그를 영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전장격투신체기법 유술체계가 성립된다. 그때 당시부터 무가병법(고류유술)이 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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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사(摂社) 와카미야 하치(若宮八幡宮)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1189년 하카와베 유끼히라(下河邊行平)에게 권청시키기 위해 신라계 팔번신(八幡神)을 모신 신사. |
이후 17∼18세기의 근세 유술(柔術)은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의 기법으로 연무상박(練武相撲)로부터 진화되면서부터 일본의 유술(柔術)은 연무스모(練武相撲)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했다. 현재 《全書》에 존재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유술(柔術)은 타케우치류(竹内流)이다. 그때 당시의 무예는 유술(柔術)에 한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즉 검, 창, 궁, 마, 유술(剣, 槍, 弓, 馬, 柔術) 등을 무사들이 종합적으로 수행했다. 신카게류(新陰流)의 무도(無刀) 신체기법들은 유술(柔術)이라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이는 타케우치(竹内) 종가의 《伝記》 구성(久盛)의 항목에 병법(兵法)의 이치가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타케우치(竹内)류 기법은 전장 구미우찌(戦場組討)이다. 이 구미우찌(組討)는 상대를 소도(小刀)로 찌르거나 포박(捕縛)하는 기법들이다. 즉, 《本朝武芸小伝》에서는 고대 고쿠조쿠포박(小具足捕縛)을 유술(柔術)과 구별하지 못했다. 이러한 기법들이 타케우치(竹内)류 종가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고쿠조쿠 구미우찌(小具足組討)를 고시노마와리(腰之廻)이라고 부른다. 또한 제산성수(提山城守)의 제타카라야마류(提宝山流)는 고쿠조쿠(小具足)의 유술(柔術)기법 위주로 하고 있다. 이 기법의 성립은 자음(慈恩)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오래되었다. 고쿠조쿠 구미우찌(小具足組討)의 유술(柔術)기법들이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와 센고쿠(戦国)시대의 전쟁에 의해 성립된다. 이 전장에서 무사들이 맨 처음에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적에게 반드시 활과 총으로 쏘았다.
그 다음에는 창과 도검으로 상대의 몸을 베고, 마지막으로 격투술로 승부를 결정하기에 관절기법들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이러한 전쟁이 없을 때에는 갑옷을 벗고 소기(素肌: 스하다)인 잡기와 받기 수행과 동시에 대련을 했다. 이 소기가 현시대의 맨몸격투유술의 본체가 된다. 즉 맨몸 본위의 신체기법으로 다채롭게 상대와 대결을 통해 오늘날까지 거듭 발전된다.
타케우치류(竹内流), 오구리류(小栗流), 아라키류(荒木流拳法), 세이고우류(制剛流), 세끼구찌류(關口流), 시부카와류(渋川流), 기토류(起倒流), 요오신류(楊心流), 텐진신유류(天神真楊流), 아라키류권법(荒木流拳法) 등의 연원(淵源)으로 하는 유술(柔術) 각 유파의 신체기법들이다.
즉 백타(白打), 권(拳), 포수(浦手), 취수(冣手), 화술(和術), 소구족(小具足), 기(氣), 요회(腰廻) 등의 명칭들은 약간씩 달라도 이 기법들의 중에서 유술(柔術)의 근본이 된다. 또한 타케우치 계서고어전기(竹内系書古語伝記)에 보면 인왕(人王) 56대 청화천황(清和天皇) 정순친왕(貞純親王) 경기(経基) 륙손왕(六孫王)이라고 했으며 처음으로 신라사부로의 가문인 원씨(源氏) 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명대 진원빈(陳元斌) 그가 일본유술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 권법(拳法)과 유술(柔術)은 전혀 다른 형태의 신체기법이기 때문이다. 진원빈(陳元斌)이 실제로 권법(拳法)의 수련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삼포(三浦), 복전(福田), 기패(磯貝)의 일본들에게 전래되었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그 이유는 진원빈(陳元斌) 그가 하남(河南)의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간 시기는 1613년인데 불교의 수행 및 권법(拳法) 모(鉾)、창(槍)、곤(棍)、청룡도(青竜刀)의 난행고행(難行苦行) 수련 후 1년 1개월의 기간이 크나 큰 문제점이라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보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고류유술 기법들이 신라사부로(新羅三郞)의 미나모토(源) 가문에서 발생하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다께다(武田) 가문의 시조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는 것은 일본 무사의 뿌리가 신라계(新羅系)임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특히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鎌倉) 막부(幕府)가 성립(1198)되던 시기에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좌주(座主)였던 자원(慈圓)은 그의 저서 우관초(愚管抄)에서 무자(武者)를 일본어 발음인 「부샤」가 아니라, 한국어의 발음 그대로인 무사(ムサ)라고 표기하여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의 장보고의 죽음은 신라 해상의 존속과도 부합되어 있었다. 신라인으로서 일본에 온 이소정 등은 장보고의 암살 후, 염장에게 가담함으로서 신라본국(新羅本國)과 관계를 지속하여 해상무역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 후예들은 고난을 이기지 못한 채 중파 적산궁(赤山宮)의 엔닌(円仁)에게 요청하여 망명하는데 이 사람들을 일본의 시가현으로 이주하여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 거주지를 형성했다.
이 사실은 적성대명신연기(赤城大明神緣記) 고증문헌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과 같이 장보고는 적산명신(赤山明神) 적신(赤神) 혹은 적신명신(赤神明神), 또는 신라명신이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엔닌과(円仁)의 밀접한 관계로 인하여 후에 적산명신(赤神明神)은 엔닌문도(円珍門徒)로부터 왕성한 숭배를 받게 된다.
그 후예(後裔)들이 신라계도래인(新羅系渡來人)들이 일본으로 귀속된 신라사부로 요시미쓰(新羅三郞源義光)의 후예이며 신라의 화랑에 풍월주가 있듯이 당대 최고 고류유술(무가병법)의 무사인 신라계 하카와베 유끼히라(下河邊行平)사실은 유적 및 문헌자료 등의 사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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