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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손영종은 삭감된 고구려 5세손 왕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240년으로 보고 기원전 277년을 고구려 건국원년으로 정의하면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지 900년 만에 망한다.’는 <유국 900년 설>을 거론한 것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론이다. 그러나 그의 삭감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계산 방식은 문제가 있다.
그는 유리왕부터 5세손이 되는 동천왕까지 10명의 왕 재위연수인 267년을 모두 삭감된 고구려의 역사로 잡으면서 5로 나누어 세손 당 평균 재위연수가 53.4년이라고 했다. 그 자신이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처럼 형제간에 126년이나 왕위에 있던 특이한 경우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 역시 한 세손으로 보고 재위연수를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5세손 왕들의 재위연수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각 세손 별 모든 왕들의 재위연수를 합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역시 자신의 논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합산된 왕들은 대개 부자지간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부자지간이 확실한 세손에 대해서는 그 수만큼의 왕 재위연수만 더해야 한다. 5세손의 재위연수를 도출하기 위해서 10명의 왕을 설정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굳이 5세손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10명의 왕 재위연수를 가지고 운운하는 것보다는, 찾아내지 못한 마지막 다섯 번째 왕을 찾아낸 뒤에 세손을 계산하고, 감안할 것이 있으면 감안한 후에, 설정된 왕의 숫자만큼 재위연수를 합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손영종의 방식대로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손영종이 축소 문제제기가 끝났다고 본 모본왕의 뒤를 이은 태조대왕에서 문제점을 찾아야 한다. 사라진 5세대의 왕들을 찾는 방식이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이 국조왕이라고도 불렸으며, 이름 역시 궁과 함께 어렸을 때는 어수라고 불렸다는 기록을 눈여겨 볼 일이다.
태조(太祖)라는 것이 나라의 기반을 잡은 이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묘호이므로,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불렸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볼 것이 아니다. 고구려 건국연대를 늦추기 위해서 써온 방식대로, 전대에 있던 국조왕을 태조대왕과 혼합하여 기록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마지막에 사관의 기록임을 전제하며 “'후한서'에 안제 건광 원년(121)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하였다. 현도 태수 요광이 임금이 죽은 것을 계기로 병사를 출동하여 공격하자고 하여 모두가 찬성하였지만 상서 진충이 임금이 죽었다고 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고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고 후일 잘되는 쪽을 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사관은 이 기록과 함께 '해동고기(海東古記)'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에 즉위하였다. 나이가 일곱 살로 국모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에 이르러 왕위를 사양하여 친동생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고 하면서, '한서'와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의문을 남겼다. '후한서'와 '해동고기'의 기록 중 어떤 것이 맞는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이 사관이 일방적으로 제시해 놓은 것임으로 임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인데, 태조대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올랐다가도 은퇴할 나이인 76세가 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대왕 94년 7월에 “수성이 가까운 신하들과 사냥을 끝내고 잔치를 하면서 ‘태조대왕과 차대왕 및 신대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고 하여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동생이 잇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 이미 늙었는데도 양보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을 세우소서.’ 미유가 말하기를 ‘동생이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에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핑계대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수성이 태조대왕의 아들도 아니면서 당연히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사가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을 빗대어 동생인 자신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반란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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