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49) 학생들을 돕는 즐거움

연재/기획 / 이현진 기자 / 2025-04-02 08:47:02
황소 어깨에
날개를 달아 준 사람들

물론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뒷받침해 주는 든든한 ‘빽’이 내게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짐과 한국 유학생들이었다.
나는 짐의 집을 떠나온 후로 틈틈이 그에게 전화를 했다. 어떤 특별한 관계로 이어 지지 않는다 해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내가그에게 해 줄 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 하나의 조그마한 기다림을 주고 싶었다. 그는 늘 혼자였기때문에.....
당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모든 일을 끝내고 한밤중에 짐과 통화를 할 때였다. 나나 짐이나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하루 종일 한 번도 떼지 않았던 입을 처음 열었다. 그는 묵묵히 나의 이야기를 다들어 주었다. 아무리 늦은 밤에 전화를 해도 그는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짐에게 밤이 늦어도 꼭 얘기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새 그것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상이 되어있었다. 써리 할머니 집에서 살 때, 나는 앞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영주권을 받기 전에는 감히 하고 싶은 일을 꿈도 꿀 수 없었기때문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풀타임으로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을나눠서 적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관광 가이드, 가게 점원, 식당 웨이트리스, 회계사 사무실 직원, 무역업, 변호사 사무실 직원, 청소관리소, 직업소개소, 동시통역사 기타 등등 세지 못할 많은 직업들이 씌어졌다. 나는 그중에서 내가 여기에 온 목적에 가장 적합한 직업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동시통역사였다. 그러나 그 과정을 받기위해서는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끔 계속적인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나는 학생들과 연관이 되는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학생들을 위해서 홈스테이를 알선해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곧바로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간 김성학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곳 메트로타운에 있는아파트에서 나를 사흘 동안 재워 주었던 김씨는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 서울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명쾌한 웃음과 호탕한 말로 나에게 희망을 주었고, 몇 주 후에 정혜숙이라는 학생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 학생을 토요일에 도착하게끔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 하숙집 알선업의 첫 고객이었다.
나는 정혜숙 학생을 맡아 줄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교회에서 만난 진이라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홍콩에서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중국말은 못해도 영어는 캐네디언처럼 완벽하게 구사했다. 진 아주머니는 흔쾌히 국제 학생을 받겠다고 하면서, 전에도 몇 번 해 본 적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했다.
차가 없는 나는 진 아주머니를 공항으로 나오게 했다. 나는 써리에서 일찌감치 몇번의 차를 갈아 타고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고마워하는 여학생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했다.
그렇게 시작된 학생 돕기 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성학 씨는더 이상 학생을 보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밴쿠버에 와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내 할 일을 찾아 나섰다.
리치먼드의 인도 아주머니 집에서 일이 끝나는 시각은 오후 5시.리치먼드센터로 나오는 버스는 5시 5분에 있었다. 그 버스를 놓치면 30분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서둘러야 했다.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와 1분 안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는 서너 블록 떨어진 버스 정류장으로 달음박질쳐야 했다. 그 시간마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오르는내가 이상했는지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날 외우기로한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게 되고, 정착지에도착하면 운전사가 흔들어 깨우면 일어나곤 했다.
목적지는 다운타운에 있는 YWCA 건물의 로비. 이곳을 만남의장소로 택한 이유는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울 뿐 아니라 차를 마시라고 눈치를 주는 이도 없었고, 오래 앉아 있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내 육신의 피로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끗이 풀렸다. 나는 의식적으로 씩씩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당당하게 악수를 나눈 후 자리에앉았다. 그러면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비자 연장은 어떻게 해요?” “홈스테이를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 “영어 학교는 어디가 좋아요?” “관광 비자인데 학생 비자는 어떻게 받아요?” “자원 봉사는 어디서 알아봐야 해요?” “캐네디언 룸메이트와 생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 “슬럼프에 빠져 영어 공부가 잘 안 되는데요.”
“룸메이트가 맘에 안들어서 골치 아파요.” “제 발음이 안고쳐져요.”
나는 비자 문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모든 비자를 혼자서 처리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 노하우를 잘 알았다. 하숙집을 찾는것은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 접근해 갈 수 있었고, 자원 봉사는 그것을 관리하는 단체에 연락해 보니 무려 1,000여군데 정도의 정보를 볼 수 있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자료에는 조류 보호부터 청소년, 노인, 병약자, 미혼모, 가출 청소년 보호, 전화 받기, 서류 정리, 육체 노동 등 수많은 곳에서 여러 종류의 자원 봉사자를 찾고있었다. 영어 학교를 추천해 달라는 학생들에게는 저녁에 그들을 직접 데리고가 위치를 가르쳐 주어 다음날 낮에 혼자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나는 돈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도왔다. 대가가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아주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내가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시내에서 학생들을 돕는 일을 마치고, 다시 버스로 리치먼드센터앞에 도착하면 밤 12시가 넘었다. 나는 이곳에서 인도 아주머니 집으로 가는 막차 12시4분 버스를 타야 했다. 가끔은 차를 놓치기도했는데, 이런 날은 30분이 넘게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김없이 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짐은나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의 하루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늦게 잠들었지만 새벽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나는 어렸을 때 잠을 아주 많이 잤다. 늘 몸이 약해서 누워 있는 시간도 많았으나 하루고 이틀이고 잠만 자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내가 어느 순간부터 잠이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물론 그것은생존하기 위해서 생긴 습관이었다.
작은오빠가 준 자극도 컸다.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면서 광주에서일을 하고 있을 때, 오빠는 늘 나에게 말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잠을 많이 자지 않는단다. 모두 똑똑하고 머리회전이 빠른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부지런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이 잘 때 1시간이라도 더 깨어 있어서 머리를쓰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야.”
그게 작은오빠의 지론이었다. 이후 나는 잠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늘 그들의 비결이 ‘잠의 절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느낀 것과 캐나다에서 부딪친 현실이합쳐짐으로써 나는 늘 깨어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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